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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금붙이·빠른걸음으로 출세한 이용익, 민족의 긴 미래 보고 학교 세우다

조선왕조 때 아이들이 부르며 놀던 '승경가'. 권력의 실재에 따라 벼슬자리의 높낮이를 매긴 옛 동요는 세태를 잘 반영한다. "원님 위에 감사/감사 위에 참판/참판 위에 판서/판서 위에 삼정승/삼정승 위에 만동묘지기." 모화사상이 사회 저류에 흐르던 세도정권 시절. 임진왜란 때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명 신종을 제사 지내던 만동묘 묘지기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이 땅의 임금이 황제가 되자 아이들은 "만동묘지기 위에 금송아지 대감"을 이어 불렀다. 그때 '금송아지 대감'은 임금의 호주머니 돈을 떡 주무르듯 주무른 내장원경 이용익(사진.1854~1907)이었다. 그가 출세가도에 오르게 된 연유를 1930년 7월호 '삼천리'는 이렇게 전한다. "그는 갑산금광에서 송아지만한 금덩이를 태황제와 명성황후에게 여러 개 바쳤고 또 황후가 대원군 세력에 쫓기어 한밤중에 향리 여주로 몸을 감출 때 다리 힘이 절륜한 그가 나는 새와 같이 황후의 몸을 안고서 하루에 천리를 갔다." 평안도 사람과 함경도 사람은 과거에 급제해도 관직에 오를 수 없던 시절. 함북 명천의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금붙이와 빠른 걸음을 사다리 삼아 왕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청렴하고 재간이 있었다. 도포 자락이 해진 것을 입고 다녔다." "개인적 욕심 때문에 돈을 탐하는 일이 없는 매우 질소한 인물이자 고종에게 유일무이의 충신이었다." 황현과 하야시 일본공사의 인물평처럼 사복을 채우지 않았고 충성심이 강했기에 1904년 그는 왕실 재정을 맡는 내장원경에 더해 나라의 재정운영권과 군권까지 손아귀에 넣은 탁지부 대신과 군부대신을 겸한 무소불위의 최고 권력에 올랐다. 이용익은 냉엄한 국제정치의 판세를 잘못 읽고 남의 힘에 기대 생존하려는 잘못을 범했다. "열강으로부터 보장받지 못한 조약이란 쓸모 없는 것이라는 점을 귀하는 모르십니까? 만약 귀국이 스스로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이 왜 당신들을 지켜주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우리가 중립적이라는 사실과 우리의 중립이 존중되기를 바란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약속을 했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 되어 줄 겁니다." 러일전쟁이 터지기 직전 그가 매켄지와 나눈 대화는 그때 대한제국이 왜 망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1905년 보성전문학교를 세워 민족의 미래에 대비하려 한 혜안은 빛났다. 이준에 앞서 헤이그로 가려 했던 그는 1907년 "학교를 널리 세우고 인재를 교육해 국권을 회복하시라"는 상소를 남기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숨을 거두었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9-22

[그때와 지금] 마젤란, 최초 세계 일주 항해 출발…1080일 만에 265명중 18명 돌아와

1519년 9월20일 마젤란(사진.1480~1521)은 자신을 포함해 265명을 태운 5척의 함대를 이끌고 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의 긴 여정을 떠났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피사로가 1533년 잉카를 정복하기까지는 상업적으로는 실패였기에 스페인인들은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관리하기보다는 아메리카를 돌아 원래의 목적지인 '보석과 향료의 낙원'에 도달하는 데 주력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신대륙은 예상보다 훨씬 광대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를 돌아 '인도양'(그들은 태평양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으로 가려 했으나 도처에서 뱃길이 막혔다. 신대륙이 북극에서 남극까지 길게 뻗어 있었기 때문이다. 1520년 11월28일 마젤란 함대는 천신만고 끝에 남아메리카 남단을 돌아 훗날 자신의 이름이 붙여진 마젤란 해협을 통과했다. 첫 번째 난관을 돌파했다. 하지만 더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지의 거대한 바다(태평양)가 펼쳐져 있었다. 이 대양의 횡단은 최초의 달 착륙에 견줄 만한 대단한 사건이었다. 콜럼버스의 항해도 마젤란의 모험과 비교할 수 없다. 콜럼버스는 33일을 항해했을 뿐이고 상륙 1주일 전부터 해초와 새들 때문에 대륙이 가까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마젤란은 그야말로 망망대해 속에서 희망 없는 100일을 지냈다. 가까스로 1521년 3월6일 괌에 도착했지만 마젤란은 4월27일 필리핀 원주민과 전투하던 중 죽었다. 그해 9월5일 1080일 동안 247명의 목숨을 희생한 끝에 세계 일주를 마친 생존자 18명이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에서 죽은 동료들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엥겔스는 마젤란 이후의 유럽을 이렇게 말했다. "어느 한순간 세상이 커졌다. 유럽인의 눈앞에는 전 세계의 8분의 1이 아닌 완전한 하나의 세계가 펼쳐졌다. 이들은 나머지 8분의 7을 차지하기 위해 앞다퉈 세계로 뻗어나갔다." 얼마 전 한국의 울산에서 북극해를 지나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잇는 '북극해 항로'가 뚫렸다. 공교롭게도 출발점은 한국이다. 북극 주변은 이미 자원 선점을 위한 세계 강국의 총성 없는 전쟁터다.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가 우리에게 찾아온 것 아닐까.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9-21

[그때와 지금] '일본이 동방의 영국이 되려 하니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프랑스로'

1870년대 초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며 개화사상에 눈뜬 김옥균(1851~1894.사진)은 1882년 두 차례에 걸쳐 메이지(明治)시대 일본을 둘러보고 마음 깊이 큰 뜻을 품었다. 사진은 박영효와 함께 일본에 갔을 때 나가사키의 우에노(上野) 사진관에서 찍은 것이다. 그때 그는 서재필의 기억처럼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을 힘 있는 근대국가로 만들기를 절실히 바란" 선각이었다. "청국이 자기 멋대로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해온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며 우리나라가 떨쳐 일어날 희망이 없는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청국의 속박을 물리치고 완전한 자주국을 세우는 일이다." 임오군란 이후 거세어진 청국의 간섭을 주권침해라고 생각한 그는 한시바삐 청국을 몰아내고 명실상부한 독립국가를 세우고 싶어 몸이 달았다. 1884년 8월 청불전쟁이 일어나 조선 주둔 청국 군의 절반이 월남으로 급파되기에 이르자 그해 12월 일본을 등에 업고 청국을 이 땅에서 내몰려 했다. 그러나 김옥균의 꿈은 원세개가 동원한 무력 앞에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때 그는 청국의 패권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자가당착을 범했다.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1894년 한.일.청 세 나라가 힘을 모아 서구의 침략을 막자는 자신의 구상을 이홍장에게 설파하고자 상하이로 갔다가 자객 홍종우의 총탄에 맞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9-20

[그때와 지금] 평생 지조 지킨 정치인 밀턴, 권력 잃었어도 도덕성 변함없어

존 밀턴(그림)이 만년에 실명 상태에서 '실낙원'을 집필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밀턴이 청교도혁명에서 찰스 1세의 처형을 옹호한 열혈 혁명가요 혁명정부에서 외교부 장관을 지낸 현실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죽은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1660년 복귀함으로써 왕정복고가 이뤄졌다. 밀턴은 반역죄로 감옥살이를 했지만 새 정부의 관용정책 덕분에 목숨만은 건졌다. 그 뒤 밀턴은 자택에 은둔해 서사시 집필에 전념했다. 55세 때인 1663년 2월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죽은 찰스 1세의 차남이자 국왕 찰스 2세의 동생인 요크 공 제임스(후에 제임스 2세)였다. 대화를 나누던 중 제임스는 퉁명스럽게 밀턴의 실명이 혁명 활동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천벌을 받아서 장님 신세가 된 것 아니냐는 빈정거림이다. 밀턴은 녹내장으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44세에 완전히 실명했다. 손님의 무례한 질문에 밀턴은 답했다. "만일 전하께서 저의 실명을 하늘이 진노하신 징후라고 생각하신다면 전하의 부친이신 선왕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겠습니까. 말씀대로라면 하늘은 저보다는 부친께 훨씬 더 불쾌하셨던 게지요. 저는 두 눈을 잃었을 뿐이지만 선왕은 머리를 잃었으니까요." 요컨대 밀턴은 "내가 장님 된 것이 천벌이라면 당신 부친은 얼마나 큰 천벌을 받았기에 형장에서 목이 잘렸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권력 앞에 흔들림 없는 선비의 모습이다. 그 후 고위 관리가 국왕의 메시지를 갖고 찾아왔다. 밀턴에게 새 정부에서 장관직을 맡아줄 것을 제안했다. 정부 입장에서 '악명 높은' 밀턴을 전향시켜 국왕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밀턴이 과거에 했던 모든 주장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쾌거일 터였다. 그 무렵 밀턴의 처지는 궁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증권으로 갖고 있다가 왕정복고의 혼란 통에 대부분 날려버렸고 부양해야 할 아내와 어린 세 딸이 있었다. 게다가 늙은 장님 신세였다. 그러나 밀턴은 국왕의 달콤한 제안을 거절했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에는 권력이나 금력에 굴복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현재 정치인들의 비리는 곳곳에서 터지고 있다. 19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부박(浮薄)한 자기 시대에 밀턴이 있어야겠다고 부르짖었지만 우리 시대야말로 '아름다운 이름'을 지킨 밀턴이 있어야겠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9-18

[그때와 지금] '독재 종식' 내건 정통야당 민주당 출범

1948년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은 내각책임제를 택하려 한 한민당의 반대를 뚫고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만들어 국회 간선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재집권이 어렵게 되자 51년 말 정권 재창출을 위해 자유당을 만들고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밀어붙였다. 이에 맞서 한민당을 계승한 민국당이 이듬해 4월 내각제 개헌안을 내자 내각제를 약간 가미한 대통령 직선제를 규정한 '발췌개헌'을 힘으로 강행해 직접선거로 다시 권좌에 올랐다. 헌법 제55조 중임 금지 조항은 장기집권의 걸림돌이었다. 54년 11월27일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할 수 있다는 규정을 넣은 개헌안이 표결에 들어갔다. 그날 개헌선인 3분의 2에 1표가 부족해 부결되자 다음 날 사사오입의 논리를 내세워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소극이 벌어졌다. 이에 맞서 결성된 '호헌동지회'는 단일야당 민주당 창당의 모체가 되었다. 1955년 9월19일 창당한 민주당이 내건 정강의 핵심은 내각책임제의 수립을 통해 이승만의 문민독재를 종식시키겠다는 것이었다. 56년과 60년 두 차례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 신익희와 조병옥이 급서하는 불운으로 민주당은 정권교체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56년 민주당 후보의 정견발표회가 열린 한강 백사장을 '흑사장'으로 만들 만큼 구름같이 모여든 사람의 물결과 60년 3.15부정선거에 저항해 일어난 4.19혁명은 그때 민심의 향배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학생과 시민들이 흘린 피의 제단을 딛고 민주당은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창당의 두 주역 구파와 신파는 이승만 독재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가 사라지자 정파적 이해만을 좇는 정권 잡기에 눈이 멀었다. 정권이 신파에게 돌아가자 구파는 신민당을 만들어 갈라섰다. 그 파벌싸움이 제2공화국의 단명을 부른 하나의 요인이었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9-17

[그때와 지금] 종교·문학·건축 대혁신···중세는 '암흑기' 아니었다

서양 역사에서 중세 1000년은 한때 '암흑시대'로 불리면서 폄하됐다. 하지만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중세 한복판인 12 13세기에 일어난 거대한 변화 때문이다. 변화는 먼저 종교에서 시작됐다.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 꿇은 '카노사의 굴욕' 사건(1077)으로 교황권이 강화되자 12세기에 들어 가톨릭의 제도가 확립됐다. 7성사의 교리가 확정됐고 특히 마리아 경배가 교리로 정착했다. 마리아 경배와 더불어 문학에 변화가 왔다. 11세기까지만 해도 문학은 대부분 영웅적 서사시 형태로 서술됐다. 남성적인 전사들이 도끼를 휘두르는 장면이 나오고 전투.명예.충성 등이 그 주제였다. 그러나 12세기의 마리아 경배와 더불어 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형성됐고 그 결과 문학에서 서사시를 대신해 '로맨스'라는 장르가 새롭게 등장했다. 건축에도 극적 변화가 나타났다. 12 13세기를 거치면서 기존의 로마네스크 양식이 고딕 양식으로 대치됐다. 두 건축 양식은 문학에서 서사시가 로맨스와 다른 것처럼 현저히 달랐다. 고딕 양식은 로맨스가 등장한 12세기에 프랑스에서 나타났는데 로마네스크에 비해 한층 더 여성적이고 세련되고 우아했다. 로맨스에서 나타났던 여성적 특징이 고딕 양식에서도 똑같이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새로 건립된 대성당들이 모두 마리아에게 봉헌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프랑스 각지에 수많은 '노트르담' 성당이 건립됐고 당연히 모두 고딕 양식으로 건축됐다. 노트르담은 '우리의 귀부인' 즉 '마리아'를 뜻한다. 고딕 양식의 급격한 수용과 발전은 12세기가 현대 못지않게 실험적이고 역동적인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역대 프랑스 국왕의 묘지였던 성 데니스 수도원 교회는 1144년에 새로운 고딕 양식의 훨씬 규모가 큰 교회를 짓기 위해 헐렸다. 역사가들은 그것이 마치 워싱턴의 백악관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미국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1886~1969)가 설계한 초현대식 빌딩을 짓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일이 오늘날 일어난다면 아마 엄청난 논란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12세기에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과감한 실험 정신과 자기 쇄신 능력은 우리 시대에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 아닐까.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9-16

[그때와 지금] 국제정세 오판한 황준헌의 '조선책략'

"사신의 별 멀리 비춰 섬나라에 이르니 황제의 은택이 곁으로 흘러 바다 한가운데까지 두루 미치네." 1877년 주일 청국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일본행 배에 오른 29세의 황준헌(사진.1848~1905)이 읊은 시구에는 변방 일본에 대한 우월의식이 가득 넘쳐흐른다. 서양과 교류가 잦은 광둥성의 객가인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메이지 일본이 일구어 놓은 문명개화의 새 세상에 접해 그는 문화의 중국화를 기준으로 문명과 야만을 가르던 화이론의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일본을 대등한 독립국이자 연대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러시아를 병적으로 두려워하는 공로증(Russophobia)에 감염되었으며 그 침략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제시된 아시아 연대론에도 빠져들었다.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대해 자강을 도모하라." 그가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온 김홍집에게 러시아를 막는 묘책으로 건넨 『조선책략』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한 세기 전 '힘의 정치'가 작동하던 그때. 그가 '연작처당'의 경구를 빌려 그 침략성을 강조한 러시아보다 "한 번도 토지와 인민을 탐한 적이 없다"던 중국과 "중국 이외에 가장 가까운 나라"라던 일본이 우리에게는 더 큰 침략자였다. 또한 "늘 약소국을 돕는다"던 미국도 그때 우리 편이 아니었다. 균세와 자강이 여전히 우리 생존의 필요충분조건인 오늘 우리가 그의 『조선책략』에서 얻을 교훈은 자력 없이 남의 힘을 빌리는 술책만으로 다시 돌아온 열강 각축의 세상을 뚫고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9-15

[그때와 지금] 제1차 세계대전은 4년 간의 참호전···흙탕물 속에서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 세계대전에는 숫자가 붙는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인 1939년 9월 '타임'지가 두 전쟁에 처음 숫자를 붙였다. 그전까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은 '대전쟁(Great War)' 또는 '4년 전쟁'으로 불렸다. 초기에 유럽인들은 전쟁이 기동전으로 곧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기관총의 등장으로 방어하는 진영이 유리해지자 연합군과 독일군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서부전선'에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막는 데 주력했다. 1914년 12월에는 스위스에서 영국해협까지 거의 1000㎞에 달하는 참호가 구축됐다. 참호전은 4년 동안 계속됐다. 참호 속에서 비는 무서운 적이었다. 전선 북부의 플랑드르 지방은 비도 잦았지만 지표면이 바다보다 낮아서 땅을 파기만 하면 물이 솟아올랐다. 이 지역을 맡은 영국군에게 가장 큰 적은 물과 진흙이었다. 참호는 늘 진흙탕으로 발목까지 빠졌고 더 깊이 빠지는 경우도 많았다. 병사들은 때로 허리.겨드랑이까지 차오르는 차가운 물속에서 며칠씩 계속 근무를 서야 했다. 1914년 10월25일부터 이듬해 3월 10일 사이에 비가 오지 않은 날은 18일뿐이었다. 이 가운데 11일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다. 1916년 3월에 내린 비는 35년 만에 최고 수준이었다. 전쟁 중 작성된 대대 보고서에는 진흙탕으로 인한 고통을 언급하는 내용이 가득하다. 때로 병사들은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체중을 골고루 분산시키려고 길게 누워야만 했다. 1916년 솜 전선의 참호에서 한 대대는 진흙 속에서의 탈진과 익사로 16명의 병사를 잃었다. 한 병사는 46시간이나 목까지 차는 진흙 속에 갇혀 있다가 마침내 구조됐지만 결국 15분 만에 죽고 말았다. 포탄 터진 자리에 생긴 구멍도 위험했다. 전투 중 부상해 정신이 혼미해진 병사에게 물이 찬 포탄 구멍은 죽음의 덫이 되곤 했다. 소총이 진흙에 빠지면 작동이 안 됐기에 병사들은 사격을 하기 위해 총에 오줌을 갈겼다. 1917년 프랑스 병사들은 작은 반란을 일으켰다. 돌격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양떼처럼 '음매~' 소리를 내며 전진한 것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정치인.지휘관들에 대한 애처로운 저항이었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9-14

[그때와 지금] 술병 속에서 시가 울던 명동의 은성

1958년 가을 명동의 막걸리집 '은성'에서 박수 소리가 터졌다. 술집 주인 이명숙(86년 작고)의 18세 외아들이 서라벌예대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던 시인 변영로(1897~1961)가 술잔을 내밀었다. "영한아 술 한 잔 받아라." 쭉 들이켠 뒤 막걸리 잔에서 술 지게미를 바닥에 털던 영한에게 시인이 냅다 뺨을 갈겼다. "이놈 곡식을 왜 버려?" 영한은 연기자 최불암의 본명이다. 그의 부친 최철은 영화제작자였는데 '내일 없는 그날'을 영화로 제작하던 59년 과로로 세상을 뜬다. 어머니는 대한제국 궁내악사를 지낸 분의 딸로 남편을 여읜 뒤 인천 동방극장 지하에 '등대'란 음악다방을 운영하다가 명동으로 와서 '은성'을 차린다. 단골이었던 소설가 이봉구('명동백작'으로 불렸다)는 이곳 풍경을 작품 속에 남겼다. 56년 3월 저녁 '은성'에 앉은 박인환(당시 30세)은 시를 쓰고 있었다. 쌓인 술빚이 미안해서 시라도 써서 갚자는 마음이었을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네"로 시작하는 '세월이 가면'은 그렇게 탄생한다. 언론인 극작가였던 이진섭(1922~83)이 곡을 붙인다. '백치 아다다'의 가수 나애심(가수 김혜림의 모친)이 곡을 따라 흥얼거렸다. 나중에 들어온 테너가수 임만섭이 곡을 보더니 열창을 했다. 이날 낮에 망우리에 있던 첫사랑 여인의 묘지에 다녀왔던 박인환은 이 시를 남기고 사흘 뒤 만취한 상태로 숨져 망우리 그녀의 곁으로 갔다. 64년 1월 9일 수필가 전혜린(당시 31세)은 밤색 밍크 코트를 입고 명동의 '은성'에 나타났다. 그녀는 쾌활했다. "국제 펜클럽대회에 나가려고 건강진단을 받았거든. 글쎄 내 몸이 괴물처럼 건강한 거야…. 박인환이 그리워. 가난에 시달리면서 미군 담요로 외투를 만들어 입고 머플러를 휘날리며 시를 읊던…." '은성'을 나오면서 전혜린은 친구에게 속삭였다. "하얀 세코날(수면제) 40알을 구했다고!" 이튿날 그녀는 수유동 숲길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2004년 EBS에서 60년대 '은성'의 기억을 다룬 '명동백작'이 방영됐고 올 들어 혜화동에선 '세월이 가면'이란 연극이 올려졌다. 은성도 인환도 혜린도 가버린 명동 쓰러진 술병 속에서 우는 가을 바람(박인환 '목마와 숙녀'중에서)만 돌아와 나뭇잎을 흔든다. 이상국 (문화칼럼니스트)

2009-09-13

[그때와 지금] '원숭이'로 조롱받았던 다윈, 승패의 관건은 도덕성이었다

올해는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 150년이 되는 해다. 다윈은 이 책에서 '인간과 원숭이의 관계'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이를 분명히 밝힌 것은 11년 뒤 출간한 '인간의 유래'에서였다. 그러나 '종의 기원'을 읽은 대중은 인간이 원숭이의 사촌이라는 함의를 일찌감치 눈치챘다. '종의 기원'에서 다윈이 주장한 것은 분명 '원숭이 이론'이었다(그림은 당시 언론의 풍자화로 다윈과 원숭이가 함께 손거울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닐 만큼 다윈의 충직한 후배 동료였던 토머스 헉슬리와 성공회 사제 새뮤얼 윌버포스 주교 사이에 벌어진 '옥스퍼드 논쟁'의 핵심이 되었다. 1860년 6월 30일 옥스퍼드대에서 윌버포스와 헉슬리가 한자리에 섰다. 교리 토론에 능했다는 뜻에서 '미꾸라지 샘(Soapy Sam)'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윌버포스는 헉슬리에게 물었다. '당신이 원숭이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조상은 할아버지 쪽입니까 아니면 할머니 쪽입니까?' 곳곳에서 웃음이 터지자 헉슬리는 당당하게 '중요한 과학 토론을 단지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 자신의 재능을 쓰려는 인간보다는 차라리 원숭이를 할아버지로 삼겠습니다'라고 되받아쳤다. 이것은 다윈 지지자들이 승리를 거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준 상징적인 에피소드다. 다윈 지지자들이 승리를 거둔 이유는 물론 그들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또한 그들이 이른바 명망가들보다 도덕성이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교적 보수성이 팽배했던 당시 영국 사회에서 불신앙은 '부도덕' 내지는 '하층계급의 급진주의'와 동일시되었다. 그것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집요한 논법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력을 '빨갱이'로 낙인 찍던 독재 체제의 논법과도 흡사하다. 다윈.헉슬리 같은 빅토리아 시대의 불가지론자들이 흠잡을 데 없는 가문 출신의 젠틀맨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더 높은 도덕성을 견지함으로써 형세를 반전시켰다. '증거 없이 믿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었다. 이념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우리 사회도 궁극적인 승리는 '더 높은 도덕성'을 확보한 세력에게 돌아갈 것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9-11

[그때와 지금] '조선인에게 자유를 주고싶다' 배재학당 세운 아펜젤러의 꿈

미국인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1858~1902)는 1885년 4월5일에 제물포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조선 사람들에게 다음 생에 누리는 영생만이 아니라 미국인이 누리는 자유를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서 누리게 하고픈 소망을 품고 있었다. 김옥균이 1883년 7월 서울에 온 매클레이 목사를 도와 기독교 학교와 병원을 세워도 좋다는 고종의 윤허를 받아냈기에 아펜젤러는 숨어 들어와 순교의 붉은 피를 뿌린 천주교 사제들과 달리 합법적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김옥균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의 여파로 중국이 조선의 독립은 물론 세상을 알기 위한 교육의 기회마저 주려 하지 않던 암흑의 시절. 1885년 8월3일 4명의 학동으로 시작한 배재학당은 10여 년 뒤에는 '배재대학'으로 불릴 만큼 성장했으며 불의의 해난 사고로 아펜젤러가 숨을 거둔 1902년까지 길러낸 인재는 500명 이상이었다.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 그때 배재학당은 이 땅 젊은이들의 굳은 머리를 녹여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는 근대 개혁가나 사상가로 거듭나게 한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였다. 그는 협성회회보.매일신문의 발간과 독립협회의 활동을 도와 자유와 인권이란 근대 가치가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널리 퍼지게 도왔을 뿐 아니라 미국 정부와 선교본부의 지시를 어기고 서재필.이승만.윤치호 같은 근대화 운동가들을 박해의 칼날에서 지켜준 방패였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서 긴 잠에 든 그의 삶은 한 세기 전 우리를 오랜 미몽에서 깨어나게 한 한줄기 빛이자 희망이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9-10

[그때와 지금] 산업혁명 선두주자 영국이 '후발' 독일에 뒤처진 이유

19세기말과 20세기초 영국과 독일은 치열한 산업 경쟁을 벌였다. 독일은 18세기에 제1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영국에 비해 1세기나 늦게 뛰어들었지만 뜻밖에도 승자는 독일이었다. 독일의 전기 산업은 186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아에게'와 '지멘스' 등의 회사들은 곧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했다. 생산량은 급속도로 증가했고 그 결과 20세기 초에 철강생산 부문에서 영국을 앞질렀고 세계적으로 화학공업 발전을 선도했다. 제2차 산업혁명이었다. 영국이 뒤처진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최초로 산업화된 국가'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이미 낡은 공장과 설비에 자본을 투자하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분야나 새로운 방법의 개발을 꺼렸다. 예컨대 영국은 최초로 산업화된 국가였기에 산업 중심지도 19세기 초의 생산 규모에 맞게 조성돼 있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철강공업은 대규모 부지와 편리한 교통을 필요로 했다. 영국은 공업도시가 비좁아 독일처럼 대형 제철소를 지을 수 없었다. 그 결과 1900년께 영국 최대의 제철소는 독일의 평균 규모 제철소보다도 작았다. 다음으로 산업 선진국으로서 '성공의 기억'이 영국의 자세를 경직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산업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돼 온 만큼 영국인은 만족했다. 하지만 증기기관과 제니 방적기 같은 제1차 산업혁명의 위업이 다분히 우연적인 결과물인 데 비해 제2차 산업혁명은 과학과 기술의 긴밀한 결합의 산물이었다. 교육 받은 노동자와 창조적 과학자 없이는 불가능했다. 독일에는 이러한 인적 자원이 있었지만 영국엔 없었다. 독일은 1825년부터 본격적 의무교육을 실시했지만 영국은 1876년에야 초등 교육을 의무화 했다. 독일은 국가 주도로 과학.기술연구소와 훈련원을 운영했지만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이런 시설이 전무했다. 요컨대 영국의 패배는 승자의 자만 때문이었다. 교육의 목적이 창의성 배양이 아니라 '신사'를 만드는 데 있다고 보았기에 과학.기술 분야로 나아가 창조적 재능을 발휘해야 할 인재들이 정계.관계로 진출했다. 과거의 경험에만 의지하려는 풍조로 인해 창조적 연구자와 모험적 사업가의 입지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되기 일쑤인 냉엄한 국제 현실이다. 우리 또한 지난 시절의 성공 기억에 안주해 변화를 거부하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9-09

[그때와 지금] 조선말기 정치 변동 따라 달력도 양력·음력 뒤바꿔

개항 이후 근대 문물을 따라 배우려 했던 이들은 개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나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서구 열강과 같은 시간체계를 세우는 시간의 문명화를 꿈꿀 수 없었다. "정삭(책력)을 바꿔 태양력을 쓰되 1895년 11월17일을 1896년 1월1일로 삼으라."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으로 중국의 종주권이 부정된 1895년 9월9일 양력을 쓸 것을 명하는 조칙이 내려졌다. "1896년부터 연호를 세우되 일세일원으로 제정하라." 양력 시행과 함께 채택된 건양 연호는 근대를 향한 꿈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한 달여 만에 일어난 아관파천으로 개력을 주도한 친일 개화파가 몰락하자 정부는 국가 기념일과 제사의 택일을 다시 음력을 따르도록 되돌렸다. 결국 이 땅의 사람들은 음력과 양력이 경합하는 독특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했다. 설빔 차림의 사진 속 어린이들 뒤에 보이는 '입춘대길'과 '건양다경(건양의 치세에 경사가 많이 있으라)'의 입춘방은 전통과 근대의 시간이 충돌하던 그때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한 세기 전 우리는 시간의 경쟁에서 졌다. 해방 직후 "학교종이 땡땡땡"을 부르며 자란 이들은 허비한 근대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 '바쁘다 바빠'와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질주했다. 속도와의 전쟁을 멈추고 느림의 미학을 되찾고 싶은 오늘.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자연에 순응하는 목가적 시간을 노래한 옛 시조가 마음에 다가온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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